본문 바로가기

TV연예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나홍진 차기작 우범곤사건 영화화?의령우순경 우범곤살인사건에대해

반응형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나홍진 차기작 우범곤사건 영화화?의령우순경 우범곤살인사건에대해



17일 곡성으로 유명한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이 알려지며 화제인데요.

나홍진의 차기작은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을 소재로 하여 제작된다고 하네요.

그러나 곧이어 나홍진 감독은 이러한 뉴스 보도에 대해 아직 시나리오 계약만 한 것이라고 해명하였습니다.



잠시 나홍진 감독에 대해 살펴보고 가면

나홍진 감독은 1974년생으로 나홍진 감독 나이는 44살입니다.

2008년 추격자 연출로 데뷔하였으며, 대표작으로 추적자 황해 곡성이 있습니다.

또한 오는 21일 홍콩에서 열리는 제11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에 '곡성'이 작품상과 감독상, 조연상(쿠니무라 준), 

음향상 부문에 후보에 올라 현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나홍진 차기작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인터뷰]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은 2년 전 다른 분의 아이디어를 듣고 그 분과 시나리오 계약을 한 것일 뿐이다.

-그 분이 아직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내가 아직 참여하지도 않은 상태.

-제작사와 계약이 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난 원래 작품을 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동할 때 하게 된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닌 것 같다.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으로 알려진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사건은 하룻에 62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경찰의 실화입니다.

당시 우범곤 순경은 동거녀와 말다툼을 벌인 뒤 예비군 무기고에서 실탄 등을 챙긴 뒤 

우체국 집배원과 전화 교환원을 살해해 외부와의 통신을 단절시킨 뒤 4개 마을을 돌며 62명을 살해했다고 하네요.

우범곤 총기 난사 사건은 1999년 조재현 주연의 '얼굴'이란 작품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럼 우범곤 총기난사 살인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악의 살인사건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은 무엇인가?


 우범곤은 1955년에 출생하여 1982년에 사망했습니다.

본적은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이며, 출생은 부산에서 했습니다.

우범곤 고향은 부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범곤은 부산 금성고등학교를 줄업한 뒤 경남공업전문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또한 1978년에 해병대 병장으로 제대했네요.




[우범곤 출생과 고향과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범곤은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였는데요.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하였으나 중도에 전출당했으며,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우범곤은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합니다.



이후 의령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2월부터 이웃에 살던 전씨와 사귀게 되었고,

3월초부터 전씨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전씨의 부모는 결혼 뒤 함께 살라고 했지만 우범곤이 결혼비용이 없어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우범곤은 집안이 가난해 열등의식이 있었고, 전씨의 집에 얹혀살며 무능함에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하네요.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 사건경위]


우범곤은 1982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 62명을 살해하고 자살했습니다.

사건당시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고 하는데요.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우범곤은 오후 4시께 출근 후 저녁 7시 반경에 만취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네요.

이어 우범곤은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으며, 이웃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고 하는데요.



지서로 향해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통신두절을 위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조총 2정과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챙겨 나온 후 

우체국 집배원과 전화 교환원을 살해했습니다.

이후 4개 마을을 돌며 62명을 살해했다고 하네요.


그의 살상극은 다음날인 27일 새벽 5시 35분까지 이어졌고, 민가에 출입해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으며,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시키면서 끝났습니다.


우범곤 총기사건은 최단시간 최다살상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르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 서정화가 자진 사임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했다고 합니다.



우범곤 총기사건이 최악의 살인사건으로 기록된 이유는?



우범곤 사건은 최악의 총기난사 살인사건으로 기록되는데요.

그 이유는 무능함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건당시 의령서에서 신고를 받고 전투경찰 30명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피격을 두려워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 있었다고 하네요.


또한 관찰 책임자인 의령서장은 근무지 보고없이 무단이탈하였으며, 복귀후에도 두려움에 빠져 도망쳤다고 합니다.

결국 당시 경찰들의 무능으로 우범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폭사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경찰도 우범곤을 막을 의지도 없었다고 하네요.


[우범곤 실제모습]


지금까지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나홍진 차기작 우범곤사건 영화화?의령우순경 우범곤살인사건에대해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정말 최악의 살인사건이네요.

하룻밤사이에 62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범곤 총기살인사건, 그 당시 경찰과 의령서장의 초기대처만 빨랐더라도

최악의 살인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었을까요?

사건 대처에 대해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무엇이 있는지 의문이네요.


그럼 우범곤 살인사건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우범곤에 대한 포스팅이 유익하셨다면 공감하트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반응형